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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제목, 첨부파일, 작성일, 조회수가 나타나 있는 목록
    번호 식품명 어원유래
    123 버섯전 전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고기, 채소, 생선 등의 재료를 다지거나 얇게 저며서 밀가루, 달걀로 옷을 입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고루 뜨겁게 익도록 하여 양면을 지져 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지진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진다는 것은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 익히는 지지미와 같은 ‘자(煮)’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뜨거운 물건에 재료를 대어 눌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궁중에서는 전 요리를 통틀어 ‘전유화(煎油花)’라고 쓰고 ‘전유어’라고 읽었으며, 보통 ‘지짐개’・‘저냐’・‘전’이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전을 제사음식으로 쓸 때에는 ‘간남(肝南)’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간적’의 남쪽에 놓이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한국요리문화사
    122 김치전 전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고기, 채소, 생선 등의 재료를 다지거나 얇게 저며서 밀가루, 달걀로 옷을 입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고루 뜨겁게 익도록 하여 양면을 지져 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지진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진다는 것은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 익히는 지지미와 같은 ‘자(煮)’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뜨거운 물건에 재료를 대어 눌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궁중에서는 전 요리를 통틀어 ‘전유화(煎油花)’라고 쓰고 ‘전유어’라고 읽었으며, 보통 ‘지짐개’・‘저냐’・‘전’이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전을 제사음식으로 쓸 때에는 ‘간남(肝南)’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간적’의 남쪽에 놓이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한국요리문화사
    121 깻잎전 전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고기, 채소, 생선 등의 재료를 다지거나 얇게 저며서 밀가루, 달걀로 옷을 입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고루 뜨겁게 익도록 하여 양면을 지져 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지진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진다는 것은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 익히는 지지미와 같은 자(煮)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뜨거운 물건에 재료를 대어 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궁중에서는 ‘전유화(煎油花)’라 적고 ‘전유어, 전유아’라 읽으며, 속간(俗間)에서는 ‘저냐’, ‘전’, ‘부침개’, ‘지짐개’라고도 한다. 또한 ‘제수(祭需)’이면 ‘간남(肝南)’이라고도 한다. 제물(祭物)로 쓰이는 전유어를 ‘간남’이라고 한 연유는 『명물기략(名物起略)』에 의하면 “전유어 속전 졔눼, 또 말하기를 간남이 전하여 간납이 되었다. 이것은 간구이(肝燔)의 남쪽에 진설(陳設)하는 수자(羞?)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전류 섭취 현황 및 기호도 P5-6
    120 굴회 접시에 쑥갓을 깔고 굴에 곱게 채친 파를 얹고 초고추장이나 초장을 곁들여 내는 회를 말한다. 한국전통식품포털(전통음식>굴회>조리법특징/정의)
    119 생미역초회 해조류를 상식하는 지역은 동남아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및 하와이 등지의 태평양 연안 국가에 국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예부터 중요시 되는 식품이다. 미역은 갈조류로서 곤포과(다시마과)에 속하는 일년생의 온대성 해조이며, ‘해채(海菜)’ 또는 ‘감곽(甘藿)’이라고 불리는 알카리성 식품이다. 식품재료학 P322
    118 대추편포 육포는 원시 수렵시대부터 먹고 남은 고기를 높은 곳에 걸어 놓아 건조되면 오랫동안 두고 먹을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면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쇠고기 원산지 차이에 의한 육포의 품질 특성 P529 일반적으로 육포라 하면 서양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어 우리나라로 전해진 식품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포의 유래는 자연물을 채집하여 식량으로 만들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축되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 신문왕 3년의 폐백품목에서 처음 나타난 기록이 있다. 육포 제조 시 염의 확산속도 및 건조 특성 P508 ‘다식 모양의 편포’, ‘네모진 모양의 편포’, ‘대추모양의 편포’ 등 ‘작은 모양의 편포는 한 문헌에 중복되지 않고 각각 한 가지 모양의 편포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은 같으면서 다만 그 모양만이 변화되어 계속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모양의 변천은 1715년 ‘다식 모양의 편포’로 시작하여 1800년대 초엽 및 중엽에는 ‘네모진 모양의 편포’로, 그 후 1938년에 이르러 ‘대추 모양의 편포’로 변했다. 주재료는 모두 쇠고기만을 이용한 것이 변화되지 않았다. 18세기 중엽까지는 ‘다식 모양의 편호’에만 부재료로 꿩고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간을 맞추는 재료의 변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다식 모양의 편포’는 간장으로 간을 맞췄는데 ‘네모진 모양의 편포’는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고 양념도 여러 가지를 썼다. ‘대추모양의 편포’는 간장과 소금을 섞어서 간을 맞추고 여러 가지 양념을 이용한 것으로 변하였다. 우육을 사용한 포(脯)류의 조리법을 중심으로 P240
    117 굴비자반 굴비는 고려 때부터 유래되어 온 것으로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이다. 조기류는 모두 민어과에 속하며 우리나라 연안에서 잡히는 것은 5속 13종에 달한다. 그중에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영광굴비는 신선한 참조기로만 가공한다. 산란을 위해 동지나 해역에서부터 추자도와 흑산도 해역을 거쳐 서해안으로 회유하는 참조기가 3월(음력) 중순 곡우 사리경 칠산 앞바다를 지날 때 가장 알이 충실하고 황금빛 윤기가 있어 이 때 잡은 참조기를 가공 건조한 것을 영광굴비라고 한다.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고려 16대 예종 때 이자겸은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는데, 그 뒤 최사전이 이자겸 일당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체포한 후 지금의 영광 법성포로 유배시켰다. 그는 유배지에서 굴비를 먹게 되었고, 마침내 칠산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진상하고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라 명명했다. 그때부터 영광굴비는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상되고 궁궐에서부터 영광굴비가 명물로 등장하여 주목받게 되었다. 지역특성화 보고서 2차년도-전남 영광 굴비- P1
    116 마늘종장아찌 '장아'는 한자어인데 옛날 문헌에는 '장아찌'를 '장앳디히'라고 하였다. 그 뜻은 '장(간장, 된장, 고추장)에 담근 채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장앳디히'가 변화하여서 '장앗디히, 장앗지이'로 되고 이것이 오늘날 '장아찌'가 된 것이다. http://user.chollian.net/~ston11/35.htm 고려 중엽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시(時)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장아찌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시에 “종은 장을 얻어 무를 재우니 여름철에 좋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깻잎장아찌의 표준화를 위한 연구 P2 장아찌는 무장아찌, 양파장아찌, 고추장아찌 등 여러 종류의 장아찌가 있는데 시대를 거치면서 장아찌의 종류를 다양화 시키는 과정에서 마늘종장아찌가 유래되었다.
    115 들깨잎장아찌 들깨는 꿀 풀과 일년생 초본식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임자(荏子) 또는 수임자(水荏子)라 기록이 있으며, 인도의 고산지대와 중국의 중남부 등이 원산지이며,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참깨와 함께 재배한 기록이 있으며, 들깻잎 장아찌는 우리나라 장아찌 역사와 함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엽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시(時)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장아찌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시에 “종은 장을 얻어 무를 재우니 여름철에 좋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는 구절이 나오며, 이것은 김치가 ‘지(漬)’란 글자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다. 깻잎장아찌의 표준화를 위한 연구 P2
    114 마늘장아찌 수천 년간 마늘은 조미료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로마인, 그리스인, 게르만인, 이집트인, 인도인과 페니키아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고대문화인의 식사에서 마늘은 큰 역할을 해왔다. 마늘 및 양파의 신제품개발 P12 장아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중엽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중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좋은 장을 얻어 무 재우니 여름철에 좋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을 대비한다고 나와 있다. 1827년 실학자 서유구(徐有?)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보면 고려 말의 김치 무리를 소금 절이김치, 초절이 김치, 장아찌, 식혜형 김치 등으로 부르게 됐다. 장아찌를 ‘제채(薺菜)’라 했는데, ‘제(薺)’는 주례(周禮)의 『오제칠온(五薺七蘊)』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의 깊은 맛 장아찌 P25 마늘의 원산지가 중앙아시아나 이집트로 추정되며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마늘을 식용으로 사용한 것은 ‘곰이 마늘을 먹어 웅녀로 환생했다.’는 단군신화와 ‘입추 후 해일(亥日)에 마늘밭에서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기록을 볼 때 매우 오래전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마늘의 녹변 P190
    113 무말랭이장아찌 무말랭이 김치는 무말랭이를 물에 불려 양념에 버무려 담근 김치로, 무말랭이란 무를 가늘게 채 썰거나 넓적하게 썰어 꼬들꼬들하게 말린 것이다. 무말랭이를 한 번에 많이 만들어 두면 일 년 내내 국이나 찌개 등의 재료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무말랭이 김치는 장아찌류의 김치로서 경상도에서 주로 많이 담가 먹는다. 건조 방법에 따른 무말랭이의 품질특성 P1 고려 중엽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시(時)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장아찌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시에 “종은 장을 얻어 무를 재우니 여름철에 좋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는 구절이 나오며, 이것은 김치가 ‘지(漬)’란 글자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다. 깻잎장아찌의 표준화를 위한 연구 P2
    112 생무장아찌 생무장아찌는 에도시대 일본에 건너가서 단무지 문화를 일본에 전수하고, 교토의 대덕사(大德寺)주지가 된 고승인 택암스님의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장아찌를 활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음식으로 추정된다. 식품과학기술대사전 장아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중엽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중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좋은 장을 얻어 무 재우니 여름철에 좋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을 대비한다고 나와 있다. 1827년 실학자 서유구(徐有?)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보면 고려 말의 김치 무리를 소금 겉절이, 초절이 김치, 장아찌, 식혜형 김치 등으로 부르게 됐다. 장아찌를 제채(薺菜)라 했는데, 제는 주례(周禮)의 오제칠온(五薺七蘊)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의 깊은 맛 장아찌 P25
    111 참외장아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계절별, 지역별로 많이 생산되는 채소류를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장아찌를 만들어 왔다. 장아찌는 우리 식생활에서 기본적인 부식으로써 뿐만 아니라, 저장 음식으로써 특히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각종 영양과 비타민을 보충해 주는 유용한 밑반찬 역할을 담당해 왔다. 장아찌는 장과라고도 하는데 무, 오이, 더덕, 고사리 등의 채소를 된장이나 막장, 고추장, 간장 속에 넣어 삭혀 만든 반찬으로 채소 외에 각종 육류 및 어류도 살짝 익혀 된장이나 막장에 넣어 만들 수 있는, 밥상 차림에 대비하는 밑반찬 중의 하나이다. 참외는 7월 말에서 8월 초쯤에 수확을 하는데 이때도 아직 숙성되지 않은 개체가 있다. 이런 개체는 양이 많지 않고 놔두어도 맛있게 익지 않기 때문에 수확하여 장아찌로 담가 먹는다. 또는 지나치게 완숙되거나 상처가 생겨 상품가치가 사라진 것을 장아찌 재료로 사용하였다.
    110 붉은봄무장아찌 우리나라 문헌에서 김치라는 말이 등장한 문헌은 불분명하나 기록을 찾아보자면 1518년 조선 중종 때 『벽온방(壁溫方)』에 ‘무딤채’라는 말이 나오고 16세기 초엽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도 ‘딤채’라는 말이 나온다. ‘딤채’, ‘팀채’와 ‘침채’는 동일한 의미라고 추측되지만 조선 시대 후기에 쓰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재료에 따라서 ‘침채’와 ‘김치’라는 단어를 병행하였다. 양념이 들어가서 버무려진 것은 ‘김치’, 양념이 가미되지 않고 소금물에만 절여진 채소를 ‘침채’로 보아 ‘팀채’와 ‘침채’를 종합해서 ‘김치’라고 표현하였다. 채소 발효품, 즉 김치를 뜻하는 용어는 해(?), 저(菹), 침채(沈菜), 지(漬), 디히(-菹), 딤채, 팀채 등이 있으며, 저(菹)는 날 채소를 소금에 절여 차가운 곳에 두어 익혀 먹는 침채류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의 무김치에 관한 역사적 고찰 P429 김치는 조선 시대 중기 이후 고추가 양념의 하나로 쓰이고 젓갈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순무가 댓무로 바뀌면서 사철 김치의 중심재료가 되고, 좋은 무가 많았으므로 무김치가 먼저 발달하고 겨울에 움에서 싹튼 무 싹을 김치에 이용하는 등 활용기술도 확대된다. 조선 중기 이후 배추가 주재료로 등장하고 조선 초기에 양념으로 사용한 생강, 천초, 마늘 이외에 어린파, 엄파, 자총 등의 파가 들어가고 청각, 거목, 신감채 싹, 유자, 석류, 배 등이 쓰이게 된다. 채소재배 발전과 함께 동치미, 나박김치 등이 발전하고, 다시 소박이, 석박지가 분화 발달하여 청담한 맛의 김치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상고시대의 ‘해(?)’는 간이 짠 것으로 변하면서 장기저장품인 밑반찬 ‘짠지’로 전이된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다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이르면 완전히 나뉘고, 그 전환과정에서 ‘장짠지’를 볼 수 있다. 채소를 장에 절이고 갖은 양념하여 장으로 간을 하여 삭히는 석박지형 장짠지, 오이에 고기를 양념하여 볶은 것을 소로 넣고 향신료 양념에 장국을 달여 부어 삭히는 소박 이형 장짠지 담금법은 상고시대의 ‘장저법’이 지금의 ‘장김치’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장과는 장아찌 중에 장류에 오래 저장하지 않고 오이, 무, 열무 등을 작게 썰어 절여 물기를 뺀 다음 조미하여 볶아 만들어 장아찌보다 오래 저장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찬물(饌物)로 ‘갑장과’ 또는 ‘숙장과’라고 한다. 한국의 무김치에 관한 역사적 고찰 P430
    109 미나리장아찌 미나리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 ""사당에 세알(歲謁)함은 떡국에 주과(酒果)로다. 움파에 미나리를 무엄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신하여 오신채(五莘菜)를 부러워하랴. 보름날 약밥제도 신라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 내어 육미(六味)를 바꿀 소냐.""라고 싱싱한 미나리를 예찬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과 가까운 식재료이다. 한국민속식물 P136-139 따라서 자연스럽게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나타나는 ‘장짠지’의 한 형태로 미나리 장아찌가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채소를 장에 절이고 갖은 양념하여 장으로 간을 하여 삭히는 석박지형 장짠지, 오이에 고기를 양념하여 볶은 것을 소로 넣고 향신료 양념에 장국을 달여 부어 삭히는 소박이형 장짠지 담금법은 상고시대의 ‘장저법’이 지금의 ‘장김치’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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